17 오래된 사이
요즘은 자극이 너무 많은 시대다. 그래서 그런지, 기질적으로 내가 성격이 급한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성격이 급하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일어나는 일이 흥미롭고, 영화 하나 드라마 하나를 봐도 호흡이 빠른 걸 좋아한다. 천천히 걷는건 답답해서 못 참겠고, 아무 읽어도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 나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 성격이 급해서 열대 식물을 좋아하는거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해야 눈에 확 보이니까 좋아하는거 아닐까 하고.
아무튼 자극에 민감해서 내가 뭐든 진드감치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점이 큰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터넷으로 남들이 키우는 식물을 구경하면서 20년 키웠다는 식물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20년 동안 한번도 흥미가 떨어져서 잊고 살지 않았을까 신기했다. 보통 자랑하는 사람들이 식물은 또 엄청 풍성하고 건강했다. 20년 동안 계속 그렇게 관심을 줄 수 있었을까. 나는 참 못되게도 내가 관심 있을 때만 들여다 보았다.
그동안 삶이 바빴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내가 너무 찔린다. 그래도 한번 들여다보고 물을 줄 수 있었는데, 그냥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거였다.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데 내가 본격적으로 식물에 빠져서 살면서 일년 넘게 꽤나 좋은 컨디션으로 함께 하는 식물들이 생겼고, 점차 늘어났다. 그래서 깨달았다. 나는 그냥 꾸준히 식물을 키워본 경험이 없는 거였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그 위에 비슷한 경험을 또 쌓는 것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쉬웠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거구나.
그러면서 욕심이 하나 생겼다. 나도 20년을 키운 식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거창한건 아니고, 매번 사는 작은 유묘들을 대품으로 키우고 싶어졌다. 언젠가 인스타에서 대품 파라이소베르디를 보고 그 시원한 잎에 매료되어서 나도 얼른 유묘를 들였는데, 한달에 잎 한장 낼까 말까 해서 답답했고 곧 관심도 떨어졌다. 그래서 당근으로 보낼까 하다가, 문득 그 시간을 인내하며 돌보는 사람만이 그 대품의 아름다웠던 잎을 보게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적당한 관심을 꾸면서 길게 보고 키워보자 싶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게 인생이라지만, 또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는 흘러갈 수 없는게 인생 아닐까. 나는 내가 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고, 식물 키우기는 좋은 첫걸음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이 꿈을 실현 시켜준 친구도 있었다. 아스파라거스들이었다. 10센치 연질분에 뜰어 우리집에 왔던 비르가투스는 엊그제 재본바에 의하면 키가 1미터가 되어가고 있었고, 목질화 되어 있긴 했지만 한 촉으로 왔던 팔카투스도 어느새 열 번째 촉을 올리고 있다. 둘 다 작고 가녀리게 와서 일년 새에 대품이 되어 있었다. 원체 성장세가 빠른 식물들이라 금방 이런 경험을 안겨주었지만, 한 번 경험해보고 나니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막 든다.
그래서 지금은 올리브나무도 있고, 구아바 나무도 있다. 지금 당장 예쁜 모습이어서 곧 너무 커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습을 만들어 가보도 싶어졌다. 대품을 만들던, 번식을 하던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런 꾸준함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요즘은 베란다 한 쪽에 햇수로 7년을 함께 하고 있는 풍란에게 정성을 쏟는 중이다. 아, 그 중 몇개는 정말 10년이 되어가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언제 데려왔는지도 기억이 안날 정도로 그동안 무심했지만, 그래도 가끔 물만 주면 베란다에서 잘 살아주었다. 이번 봄에는 수태도 갈아주고, 더 통풍이 잘 되는 집으로 이사 시켜주었다. 올 여름에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지난 겨울이 너무 힘들었다), 내년에는 조금 더 커진 몸집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