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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튼, 식물_임이랑
    2023. 5. 23. 08:50

     

       또 열두시가 넘었다. 책 읽는 속도가 엄청나게 느린 나는 오늘 집어든 책을 어쩌다보니 다 읽었다. 자야되는데 하면서 완전히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오늘은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면서, 그러다 결국 오늘도 열두시 반이 넘어버렸다. 눈꺼풀은 무섭고, 내일 잘 일어나려면 자야하는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 새벽의 힘을 빌어 나도 무언가를 적고 싶었다.
    한번도 이랑 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들으면 아는 노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아는 노래는 없다. 즉 나와 접점이 어떻게든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들이 이렇게 하나하나 공감이 가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이게 식집사들의 마음인가. 그리고 또 신기하게 내가 그냥 내 느낌에 따라 붙여서 하는 말들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요즘 식집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들이 사실 이 분의 글에서 시작한게 아닐까 싶었다. 이랑님이 겨울에 식물들을 실내로 들여와 테트리스로 자리를 잡아준다고 했는데, 이 말은 요즘은 sns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랑 님은 나보다 몇년 전에 식물에 푹 빠진 사람인 것 같지만, 식물을 키우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고, 다른 사람들이 키우는 식물 사진을 보고, 어딘가 요즘 내 일상과  크게 멀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지만, 아직은 그래도 이런 패턴이 몇년은 유지되는구나 싶었다. 식물을 돌보고 하는 과정도 나의 하루 일과와 비슷해서 놀랐다.
      제일 신기했던 대목을 다들 핀터레스트에서 보았다는 ‘칼라데아 오르비폴리아’였다. 나도 몇 년 전에 그 사진을 보고 바로 오르비폴리아를 들였는데, 진짜 그 사진 하나에 수십명 아니 수백명, 어쩌면 수만명이 낚였을지도 모르겠다. 습도 때문에 이파리가 타지 않고 그렇게 키우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데, 요즘 자신감이 붙었다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솟도 있다.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잠들기 전에 또 주문을 하고 말 것 같다. 아무튼, 핀터레스트, 이랑 님도 그 사진을 보고 오르비폴리아를 구하러 꽃시장으로 달려 가셨다고 한다. 내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널려 있었으니, 아마 나보다 좀 더 앞서 가신 듯ㅎㅎ
      ‘열심히 죽이는 삶’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많이 죽여봐야 잘 키운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다. 판사는 죄없는 사람 백명은 감옥에 보내야 진정한 판사가 되고, 의사는 사람을 백명은 죽여봐야 진정한 의사가 된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식집사도 식물 수백개는 죽여봐야 살릴 수 있는 경험치가 쌓인다. 달리 말하면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다음을 성공하는거 아닐까. 아무리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실제로 죽이는 그 과정이 없다면 어떠한 정보도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같다.
      식물 애호가들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씨앗부터가 궁금한 사람들이고 하나는 완성품을 데려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내 기질적 측면도 영향이 있겠지만, 완전히 전자이다. 작은 것을 데려와 크게 키우고 싶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모두 궁금하고, 내 손으로 키우고 싶다. 근데 또 그 긴 시간을 진드감치 기다리지 못하는 급한 성격.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사람이다. 근데 아무리 갈등이 강해도 완성품을 데려오고 싶지는 않다. 말이 완성품이지, 곧 더 자랄 것이고 더 다듬는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식물에 완성품이라는 것이 있을까. 아무리 예쁘게 식재해도 3개월이면 달라지고, 6개월이면 다른 식물 같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키운다’라는 말이 맞다.
      그러니 식물을 소모품처럼 가져다놓고 시들면 버리고 새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물건이라면 그런 관점이 맞겠지만, 물건 같이 가만히 있어도 그 안에서는 치열한 세계가 있는 생명체인데, 그런 사람들이 나도 싫다. 적당히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 조금만 관심과 손길을 주면 훨씬 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텐데. 조금만 공부하면 그 식물도 거기서 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텐데. 살아 있는 것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건너편에 보이는 두 동의 거대한 회사 건물도 일년 내내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식물도 그런 취급을 한다는게 이해가 안갈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큰일이다. 이랑 님이 하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도 왜 이렇게 얹을 말이 많은지. 이러다 오늘 밤을 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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