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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무언가 하고 있다
    나의 식물일지 2023. 5. 7. 00:51

      우리 집에는 플로리다 고스트가 하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한 번도 예쁘다 생각한 적 없었는데, 이름 때문에 들였다. 플로리다에 잠시 살았단 추억 때문에 그 이름에 마음이 탁 하고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취향은 아닌 관계로 고르고 고르다가 연한 연두빛인 고스트가 제일 낫다는 생각에 나의 정원(?)에 들였다.  잎 몇장 달지 않고 도착한 플로리다 그린은 그렇게 우리집에 잘 적응하면서 신엽을 쭉쭉 내주었다. 추웠던 지난 겨울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신엽을 올렸다. 잎의 모양도 매력적이고, 색도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의 싱그러움이라 점점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한 때는 내 마음 속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예쁨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겨울에도 열심히 새로운 잎을 만들었기 때문에 날이 따뜻해지면 더 폭발적인 성장력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왜인걸 고스트를 봄 내내 그대로 얼음이었다. 봄이 오자마자 조금 더 큰 화분에 새로운 상토에서 분갈이도 해준 후라 기대가 컸는데, 신엽을 싸고 있는 분홍색 껍데기만 있고 신엽은 좀체 껍데기를 뚫고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왜 그대로지, 왜 얼음이지, 무슨 문제가 있나. 고스트가 고스트 잎 하나도 내주지 않아서 좀 걱정이던 차에 신엽이 멈추어 버리니까 화분을 한번 엎어 봐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근데 한때는 신엽이 계속 나오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별 이상이 없는데 엎었다가 멀쩡한 뿌리만 보고 다시 심었던 기억이 떠올라 주저하게 되었다. 아무리 다시 봐도 하엽도 없고 새로나는 잎도 없었다.

      이 따뜻한 봄에 다른 애들이 줄줄이 신엽을 내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들은 진짜 미친 듯이 새촉을 올렸고, 그 중에서도 비르가투스는 한 번에 4촉을 올리는 중이었다. 페페는 봄이 오자 키가 쑥 커질 정도로 신엽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진딧물의 엄청난 공격에도 새 가지를 뻗어 나가는 장미조팝도 있었다. 플로리다 고스트만 얼음이었다.

      다른 애들이 막 치고 나가는데 제자리에 있으면 괜히 더 불안해지는 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화분을 엎어야 하나, 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 마음을 억누르고 좀 더 기다려보는건 상당히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얼마전에 분갈이 했으니 또 뿌리에 스트레스 주지 말자, 쟤도 뭔가 열심히 하고 있겠지. 그러다 어느 정도는 오기도 생겼다. 내가 더 잘 참나 너가 준비를 끝내고 새 잎을 내나 보자. 그렇게 두 달 조금 안되게 기다린 것 같다.

      아침마다 들여다보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별로 기대도 없었다. 그냥 새순이 나라고 있는 부분이 멀쩡하기만을 바랬다. 그 부분만 멀쩡하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새순은 나올 것이다. 그래 쟤도 뭔가 열심히 하고 있겠지.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꾹 참고 화분을 엎어보지 않았더니, 드디어 분홍색 껍데기를 뜷고 연한 연두빛의 뭔가가 쑥 하고 나왔다.

     

    플로리다 고스트 신엽

     

    그렇게 걱정을 시키더니 예쁘게 신엽을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색도 연한 것이 혹시나 고스트가 아닐까 기대하게 했다. 며칠 더 지켜본 결과 고스트 잎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나와주니 기분이 좋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플로리다 고스트는 필로덴드론 종류들 중에서 성장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신엽이 나오면서 마치 발레리나가 턴을 하는 모습으로 펴지는 것은 놓치지 싫은 모습 중 하나이다. 조만간 또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역시 내가 모든 사정을 알 수 있는건 아니다. 왜 기온도 올라간 이 시점에 신엽이 안나오다가 비로 며칠 추워지니까 신엽이 나오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 방법은 없다. 역시 내가 모른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고 단정 짓지 않길 잘했다. 멀쩡한 화분만 엎었다가 스트레스만 주고 신엽 보는 시기만 더 늦어질 뻔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자연의 꾸준함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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